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

20200604 연중9주 목요일 묵상 - 대신 쓴 연애편지 같은 기도 -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0. 6. 4. 16:49

 


한 십년 전 즈음에 우리나라에 '시라노 연애 조작단'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었습니다. 엠마오를 갔을 때였던가 확실치 않지만 이 영화를 신학원의 형제들과 함께 봤었어요. 재밌게 영화를 보고 나서 다들 각자 자기의 경험에 따라 영화 속의 인물에 몰입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열띠게 나누며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은 모세오경 중에서도 그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는 레위기의 또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계명 중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는 그 '시라노 연애 조작단' 영화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저의 신세가 주인공 시라노와 같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시라노'라는 1897년 프랑스의 소설인데, 조금 슬픈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시라노는 문학 무술 등 다방면에 걸쳐 존경받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그가 가진 기형적인 외모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같은 여인을 사랑하는 한 청년의 부탁을 받고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기 시작합니다. 그 애틋한 편지 때문에 여인은 그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시라노는 괴로웠지만 청년이 전쟁에서 전사하고 나서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이 편지를 대신 써주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밝히지 못합니다.

 

수도원에 입회하고 나서 만나는 몇 가지 큰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 중 하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오는 성경구절들을 만나는 것이었었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은 자신에 대한 성찰을 계속하면서 이전과 다르게 자신을 보게 된 것인 듯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이전과 다르게 만나게 되면, 그렇게 다르게 만난 자신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세상도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말씀들도 이전과 다르게 다가오는 것을 체험합니다.



입회 후 수도생활을 하는동안 한동안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어려워 졌었습니다. 그동안 보지 못하고 살았던 자신의 처참하고 부끄러운 본 모습을 보고 마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는 커녕 그런 모습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조차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시기의 저에게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은 이해할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사랑할 수 없는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건지... 어쩌면 죽기 전에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될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를 조금 더 지나면서 공동체의 도움으로 저도 조금씩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받아들이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렇게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과 이웃 역시 과거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아마 제게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아직도 저는, 시라노가 다른 청년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듯, 참 내가 아닌 잘못알고 있던 나를 위해 하느님께 대신 연애편지를 써주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 또 그 사람에게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신이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일인 것 같습니다. 참다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서 하는 만남은 참다운 만남일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도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나는 무의식 중에 속으로 엄청 화가 나 있는데, 의식에선 그걸 모르고 기쁜 마음인 채 하느님과 만났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남을 참된 만남이라 하긴 어렵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 자신을 제대로 다 보지 못하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작업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자신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면서 달리 보이는 이웃과 세상, 그리고 다르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체험들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의미가 있는 길이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은 어느 순간 하고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다 할 때까지 부족한 채로 끊임없이 해가는 작업이라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지난하지만 보람과 기쁨이 있는 길이라는 것을요.

 


내가 솔직하고 참다운 나를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때, 그런 나는 이웃도 참되게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또한 그런 나로 하느님도 참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솔직하고 참다운 나로서 하느님을 만날 때 나는 더이상 시라노처럼 다른 이를 대신해 써주는 연애편지가 아니라, 오롯한 나의 연애편지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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