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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9 부활2주일 묵상 - 부활, 온전히 받아들인 것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0. 4. 18. 23:32

 

고등학교 시절 공부, 친구, 학원, 운동 등 그 시절 저의 삶에서 중요한 일들이 여럿 있었지만, 제가 뚜렷한 목적을 갖고 하고 있었던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시절 종교를 가졌던 목적은 다른 것들에 비해 뚜렷했습니다.

올바른 삶, 가치있는 삶을 배우고 또 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 제 주변 어디에서도 그것을 제가 납득할 만큼 잘 알려주거나 보여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은 강론시간, 교리시간, 또 교리선생님이나 친구들과 노는 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나 나눔을 할 수 있는 곳이었고, 그래서 그곳은 그 시절 저에게 신세계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이라면 그것은 저에게 그리 가까운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부활절이라는 대축일은 성탄절처럼 휴일도 아니었고, 게다가 평일인 성삼일은 혼자 성당을 다니던 저에겐 생소했고 어떤 큰 의미도 없었습니다.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이 부활과 영생이 저에게 조금이라고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지금으로 부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부활절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강생도 의미가 없었을 것이고, 부활 이후 성령 강림을 통해 교회가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핵심 교의이자 믿을 교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가 죄를 용서 받았고, 우리 역시 부활하여 하느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제가 고등학교 때에 세례를 받고 성당을 다니면서도 저는, 죽음 이후에 부활해서 영생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학생시절의 제게는  올바른 삶과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부조리함과 불평등함의 문제들이 죽음 너머의 문제보다 더 저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라면,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저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저는 신학교에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아 부활에 대해 눈이 크게 뜨이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것은 부활이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서 남이 사는 것, 내가 죽어서 세상이 사는 것, 지금의 내가 죽어서 새로운 내가 사는 것이라는 의미 또한 포함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을 송두리채 앗가갔던 그 떨림은, 아마 그 때까지의 저의 인생관과 저의 신앙이 처음으로 제 안에서 온전히 합쳐지며 생겨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 때부터 부활은 저에게 먼 나중의 일도 아니었고, 별 의미 없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바로 지금의 일,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활의 더 깊은 의미, 더 참된 실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큰 의미를 준 두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저희 수도회 필리핀 신부님과의 대화였습니다. 당시 저희 수도회 총원은  중국 선교를 위해 필리핀 관구와 한국 관구(당시에는 지구)가 먼저 대만으로 진출하는 방안을 고려중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한국을 방문했던 필리핀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잘은 모르지만 제가 아는 대만의 상황을 봤을 때 짧은 시간에 결과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아요. 어쩌면 신부님 가신다 해도 신부님 생전에 아무런 결과를 못 보실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러자 신부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리차드 수사님, 제 대에서 안되면 제 다음 사람이 하면 되고, 그 사람 대에서 안되면 그 다음 사람이 하면 되지요. 저는 그 밑거름이 되는 걸로 족합니다."

해외선교를 꿈꾸고, 선교를 가서 어떤 일들 이루어내고자 열망하고 있던 시절의 저에게, 그 신부님의 말씀은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삶은 그런 것이라고.

 

다른 하나는 안셀름 그린 신부님의 '당신은 이미 충분합니다.'라는 책 중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입니다.

"신학의 기본원칙은, 하느님께서 온전히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변화되고 신격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원칙은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내가 나에 대해 온전히 받아들인 것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내가 거부한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려면 먼저 내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채 변화시키려 하면, 상대방은 나에게 맞서고 자신을 변호하고 방어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면,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는 나에게도 어떤 종류의 변화가 일어나고, 또 상대방에게서도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을 저도 수도생활을 하면서 깊이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대상이 남이든 나 자신이든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행위였습니다. 온전히 한 인간으로 수난과 죽음을 겪으셨던 것도 그러합니다. 그 받아들임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들의 삶을 부활의 삶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부활의 삶은 그렇게 나 자신을 그리고 다른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삶이며, 그것에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변화의 삶입니다.

 

지금 저는 어린 시절 제가 알고 싶었던 올바른 삶,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얻고 살고 있습니다. 그답은 부활의 삶입니다. 그것은 나와 이웃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과, 그것은 내가 사는 동안 내가 바라는 결과를 볼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진정한 평화도 그리고 겸손까지도 거기에서 온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자비도 거기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두 독서에서 노래하는 삶이 참 아름답습니다. 부활의 삶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는 하루.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믿고 사랑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는 하루. 이런 삶을 저도 오늘 그리고 이번 주 잠시 잠깐이라도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면서 그 안에서 조금 더 나를 부족한 대로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는 삶입니다. 부활의 삶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고 함께 즐기고 싶어진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평화와 겸손과 자비로 흐르게 된다는 것도 경험합니다. 하느님께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나를 조금 더 내려 놓는 용기를 조금 더 청하며, 두 독서에서 노래한는 아름다운 삶을 잠시 잠깐이라도 살아내는 한 주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저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부활 2주 독서 및 복음 읽기(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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