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

2020503 부활 4주일 복음묵상 - 그 너머에 있는 -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0. 5. 3. 14:30

 

 

"아빠, 엄마가 정말 오랫동안 아빠에게 거짓말을 해왔단 걸 알게 된다면, 아빤 어떻게 하시겠어요?"

오랜만에 보고 있는 어느 드라마에서 들은 대사 말입니다. 저도 잠시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청소년기를 지나고 꽤 오랫동안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것들을 별로 보지 않았습니다. 청년기에 제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 제가 봤던 책이나 영상들은 거의 다 자기계발이나, 지식이나 기술 습득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에도 최소한 외국어 공부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달 수 있을 때에만 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인의 선물로 창작과 비평이라는 잡지를 정기 구독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보믐 정말 오랜만에 단편 소설을 하나 읽게 되었는데, 오래된 일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짧은 글을 읽고 한동안 무시해 왔던 소설의 위대함을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그 소설 너머에 무언가로부터 무언가 저에게 와 닿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소설을 읽을 땐 주로 이야기를 따라 갔습니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상황이나 사정에 마음을 쓰고, 저의 모습과 비슷한 인물이 있다면 감정을 이입했습니다. 행여나 뜻하지 않은 이야기의 과정과 결말을 만날 때면 제 마음은 송두리채 뒤흔들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30대 초반이 되어 읽었던 그 단편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흐름 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소설에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그 너머에 담겨 있던 어떤 것들. 거기 깃든 작가의 삶이라던가, 그 소설에 대한 작가의 마음 같은. 

 

"그럴 일은 절대 없어 하하.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엄마가 왜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건지 한번 알아볼 것 같아. 거짓말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무언지"

 

따뜻하게 아빠는 "그 너머에 있는 것" 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아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많은 것들은, 그 너머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문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문들은 나를 막다른 곳에 있는 것 처럼 느끼게도 하고, 지치게도 하고, 외롭게도 합니다. 그런 문들은 문처럼 보이지도 않은 뿐더러 알아채고 열러고 해도 다른 문들 보다 열기도 몇 배가 더 버겁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문들을 열어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1-3)"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우리 삶에서 '어디가 문'인가를 식별하는 일과 '문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려줍니다. 그 것이 열려야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고 그 분을 만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한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 제 친구가 정말 오랫동안 성당을 안 다녔는데 이번에 본당에서 미사를 재개하면서 한 합동판공성사를 보고 영성체도 했어요. 뭔가 느낀 듯 눈물을 보이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는 저도 마음이 애잔해 왔습니다. 그 눈물 너머로 그 친구가 오랜 시간 동안 겪어왔던 것들과 지금 겪고 있는 것들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에게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문이 열렸고, 냉담의 문도 열렸으며, 눈물의 문도 열렸던 겁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만났을 겁니다. 제 마음도 아프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또 조금은 절절해지기도 했습니다.

 

오늘 제 삶에서 만나는 많은 문들을 지혜롭게 발견하고 열어 낼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청하고자 합니다오늘 2독서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제 더 이상 길 잃은 어린 양이 되지 않도록,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도록. 

오늘 연락 받았던 그 친구 처럼 제가 부족해도 그 분은 알아서 때가 되면 열어 초대 해 주시는 분이시니, 그분께 의탁하고 오늘의 길을 걸어갑니다. 사실 하느님은 문을 열기 전에도, 그 문을 찾기 전에도, 지금 저와 함께 걷고 계시는 분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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