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

20210313 사순 3주 토요일 - 오늘 내가 번제물을 바친다는 것 -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1. 3. 14. 12:07

 

 

오늘 복음을 묵상 하면서 지난 토요일에 했던 성찰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지금 제 마음 안에 '제작년까지 10년 동안 학생수사로 신학원에 사는 동안 그래도 나는 열심히 산 편이고, 희생하고 배려하며 잘 살았던 편이야' 라는 어떤 자부심 같은 교만이 깊이 남아 있음을 성찰했었습니다. 이어서 그 시절의 열심했던 저의 마음이 사실은 경쟁심이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던 욕심에 크게 뿌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또한 그 마음은 지금 양성장이 되어 담당하게 된 학생 수사님들을 보면서 저절로 느끼게 되는 사랑과 관심의 마음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게 된 성찰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전의 저의 마음과 꼭 같은 이런 구절을 만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

 


 

모두가 열심히 사는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웬만한 노력 없이는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하지만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깍아내리는 방법입니다. 작은 노력에도 만족할 만한 큰 결과를 쉽게 낼 수 있습니다. 

 

신자 분들을 만날 때 저와 관계가 좋지 않은 형제들에 대해 아쉬운 말씀들을 하시면, 제 입술은 순간순간 춤을 춥니다. "아, 맞아요, 그 분이 좀 그렇죠." 라는 말이 하고 싶어서요. 정말 단순하고 아무 것도 아닌 말이지만, 그 효과는 크다는 걸 잘 압니다. 이야기 하는 사람과 더 싶은 유대를 맺게 될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답답함도 위로받는 효과 만점의 일인데, 별 노력없이 단 몇 마디 말로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몇 마디는 "실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로 시작하는 이야기의 문을 열곤 합니다. 제게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입니다. 이 유혹에 빠지면 결국 저는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구절을 마음으로 하게 되고 맙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성찰은 저를 오늘 1독서인 호세아 예언서의 6장 6절에 머물게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번제물을 바치는 것에는 몇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의 죄를 양이나 비둘기 같은 제물에 대신 짊어지우고, 그것들을 바침으로써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당연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더 자주 제물을 바칠 수 있으니 자신을 더 깨끗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제물을 바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보다 더 죄인으로 생각하고 무시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저 바리사이의 기도도 그런 맥락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향해 오늘 1독서의 호세야 예언서는 이렇게 외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이런 말씀은 성경 곳곳에 나오는데 하나씩 살펴 보면 그 뜻을 더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마태오 복음 9장에서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고는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었는데, 세리와 죄인들과 밥을 먹는다고 바리사이들이 뭐라고 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마태오 복음 11장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 배가 고파 이삭을 뜯어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뭐라고 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12,7)

 

마르코 복음 12장에서 율법학자 한 사람 첫째 가는 계명이 뭐냐고 묻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 보다 큰 것은 없다고 대답 하시자 율법학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

 

이 율법학자는 구약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고 인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도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무엘기 상권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1사무 15,22)

 

이 밖에도 구약의 시편 50장 8절,  지혜서 21장 3절, 이사야서 1장 11절, 예레미야서 7장 22~23절 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위 사무엘기 상권의 '명심'이라고 번역된 부분이 영어 성경의 다양한 버전의 번역을 찾아보면 heed (조심, 주의하다), submission(복종), to listen(듣기), attentiveness(관심, 친절) 등의 단어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호세야 예언서 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러 곳에서는 단순히 제물을 바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하느님을 아는 예지로, 이는 하느님 말씀에 주의하고 복종하고 들으며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죄인으로 무시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에서, 제물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바치고서는 스스로를 깨끗한 사람으로 여기던 구약시대의 나쁜 관습의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또한 그래도 나는 다른 이들보다 더 노력한 더 나은 사람이야 라고 여기는 교만과, 또 다른 사람들을 헐뜯으며 나를 드러내려는 욕구에 빠지곤 하는 저의 모습도 성찰하게 됩니다.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명심하는 일은, 내가 오늘 무엇을 제물로 삼고 나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있는지와 내가 어떻게 남을 헐뜯으며 나를 세우고 있는지를 멈추고 보게해 주는 일일것입니다.   

 

사순 3주를 마무리하는 오늘 동안, '과연 나는 무엇을 제물로 삼고 하느님께 바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보다 내가 해야 할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묵상하고 성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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