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마태복음

20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안나 기념일 묵상강론 마태 13,18 - 23 [기도를 제일 방해하는 딴생각과 요아킴과 안나 그리고 씨뿌리는 비유]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4. 7. 26. 20:23


[기도를 제일 방해하는 딴생각과 요아킴과 안나 그리고 씨뿌리는 비유]
20240726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안나 기념일 묵상강론 마태 13,18 - 23


고해성사나 신앙상담을 하다보면 기도를 방해하는 가장 크고 빈번한 요인 중 하나로 딴생각을 이야기 하십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는 것 보다 딴생각을 떨쳐버리는 것을 더 어려워 하시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딴생각에 대해서 그동안 제가 공부한 것들을 조금 함께 살펴보고, 이 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아킴과 안나의 이야기 그리고 오늘 복음의 씨부리는 비유와 어떻게 함게 묵상할 수 있는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딴생각이 쓸데 없는 것이라고 보통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많은 과학자들은 딴생각을 집중의 반대도 아니고 죄의식을 가질 일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가치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연구를 통해 딴생각 중 발생하는 세 가지 핵심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딴생각 중에 천천히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정신의 일부는 배회하며 지금 읽는 단어가 자기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내가 하는 말이 모순적인지, 아니면 갑자기 어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이런 방황할 정신적 공간이 필요하다. 여러분 뭔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여기서 책읽는 것을 기도랑 바꾸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기도 중에 천천히 세상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동안에도 정신의 일부는 배회하며 지금 하는 기도가 자기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내가 하는 기도가 참된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어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여 하느님의 발자취를 발견하게 됩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이런 방황할 정신적 공간이 필요하다.

둘째, 딴 생각을 할 때 우리의 정신은 서로 다른 것들을 새로 연결하기 시작하며, 종종 해결책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19세기 프랑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는 여행을 떠나 버스 계단을 오르는 중 오랜 문제의 답이 성괌처럼 떠올랐다. 과학자 네이선은 “창의력은 뇌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곳에 있던 두 가지를 새롭게 연결하는 거예요.” 라고 합니다. 기도 중에 드는 딴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도 우리 정신의 일부는 서로 다른 성경말씀과 성경 말씀이 연결되어 떠오르기도 하고,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내 삶의 시련과 하느님의 은총이 연결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나를 묶어두었던 질문의 답을 찾기도 합니다.

셋째, 딴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는 과거를 더듬고 미래를 예측합니다. 기도 중에 드는 딴생각은 우리를 과거 성찰의 순간으로 안내하기도 하고 미래에 회개의 다짐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딴생각이 모두 기도의 반대도 아니고 모든 딴생각에 대해 죄의식을 가질 것도 아닙니다.

딴생각에 대해 조금 다른 측면을 말하는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2010년 하버드의 과학교수 댄 길버트와 매슈 킬링스워스박사가 개발한 앱에 따르면 딴생각을 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두 사람은 딴생각을 하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이다라고 결론내렸다. 딴생각을 하면 저절로 이미 자신에게 가득한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두 가지 다른 주장들을 통합한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스트레스가 적고 안전한 상황에서 딴생각은 기쁨, 창조적 힘이 된다. 반대의 경우는 고통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딴생각이 좋은 영향을 주는가 나쁜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 주장은 오늘 복음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딴생각과 싸우면서 복음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질 때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복음 말씀을 받는 우리가 가시밭인가 돌밭인가 좋은 밭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는 것인가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함께 사는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처한 상황에 우리가 안전하게 있을 때 우리는 좋은 땅으로 복음 말씀받을 수 있습니다. 묵상도 창조적으로 잘 됩니다. 하지만 내가 불안하고 걱정할 거리가 많은 불안한 상태일 때 받는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고통이 될 수 있습나다. 안그래도 힘든데 뭔가 더 해야 하는 것 같은 부담으로 다가오죠.

우리는 완벽주의에 빠지면 안됩니다. 잘못 사용되는 신학이나 얄팍한 심리학은 무조건 나의 죄라고 생각하도록 하고 무조건 나의 문제로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것을 내가 회개해야 하는 문제고 모든 것은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변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두 사람인 요아킴과 안나 성인의 축일을 기리고 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이들이 조현병이나 아동학대를 하는 부모였다면 성모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처럼 때로 우리가 좋은 밭으로 복음 말씀을 듣기 위해 주변 환경의 적절한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동시에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따라 복음 말씀이 부담과 고통으로 다가올 때도 있으며, 그것이 절대로 나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우리 모두가 요아킴과 안나 같은 부모님, 요셉과 마리아 같은 부모님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하지만 우리는 모두 예수님과 성모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람과의 만남보다 더 큰 공간에서 더 큰 시간에서 그분들을 만나는 우리는, 우리 더 깊은 차원에서도 그분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과 연결 될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런 때의 기도 중에 드는 딴생각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깊은 내면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다른 말씀들과 연결하고 또 창조적인 묵상을 하는 토양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비록 깊지 못하고 딴생각이 자꾸 들더라도, 우리는 기도 안에 예수님과 성모님께 의탁할 때, 우리의 딴생각은 좋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복음 말씀이 싹트는 좋은 토양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