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2 대림2주 목 묵상강론 마태 11,11-15
[ 어떻게 인간은 이토록 잔인하고 또 동시에 이토록 아름다운가]
그저께 10일 자정 즈음 노벨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내란 정국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이 때에 유튜브 영상들 사이에서 그나마 위로를 주는 빛나는 영상이었습니다. 사실은 지금도 잘 믿기지가 않습니다. 박지성이 영국 명문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할 때나, 손흥민이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득점왕을 할 때나, 비티에스나 블랭핑크가 미국 빌보드 챠트나 일본 오리곤 차트에서 1위를 할 때에도 정말 놀랐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이 한글로 쓴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 했었기에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정말 케이팝 케이컬쳐의 영향이 큰 모양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번역가가 일을 다 했구나 생각했었으니까요.
한강 작가가 노벨평화 상을 받기 전, 저는 글쓰기 모임에서 종종 ‘한강 작가의 문체는 내 스타일이 아니예요. 너무 오글거려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무슨 잘난척이냐며 봉변을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자정 쯤 시상식이 시작되는 것을 라이브로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놀람, 감동, 동양인이 이런 상을 받았기 때문에 더 기뻐하게 되는 현실에 대한 설움, 내 스타일이 아닌데 저런 상을 받네 라는 일종의 자괴감 등. 그런데 수상 소감에서 한강 작가는 자기가 초기 작품활동을 하는 힘이 된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입니다.
작가는 십대 초반의 나이에 피해자들끼리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하던 ‘광주 사진첩’이라는 책을 봤다고 합ㄴ다. 잔혹하게 살해당한 사람들의 얼굴 사진들을 보고, 동시에 또 한 편에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끝없이 줄을 서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는, 인간은 어떻게 인간에게 이렇게 잔혹하게 행동하는가 또 어떻게 인간은 인간에게 이렇게 아름답게 행동하는가? 라는 서로 충돌하는 질문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대학교 1학년 대학교 가톨릭 학생회 동아리 방 캐비넷 제일 아래 숨겨져 있다시피 꽃혀있던 그 사진집을 처음 봤습니다. 꺼내 펼치들고 차마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덮어버리고서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책은 저에게 성소의 밑거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잔혹할 수도 있고 또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는가 하는 충돌하는 고민을 지금 내란 사태를 둘러싼 한국의 상황 곳곳에서도 저는 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떻게 인간을 이렇게 창조하셨을까. 하느님은 어떻게 인간을 이렇게 두고 보실 수 있는가. 그리고 45년 전 오늘 79년 12월 12일은 또 다른 앞선 쿠테타가 있었던 날입니다. 어떻게 이런 잔혹한 역사는 반복되고, 또 그 와중에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역사도 반복이 되는가. 이런 충돌하는 역사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동해야 하는가. 그런데 이 고민에 대한 일부분의 답을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동안 조금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헤로데 왕과 세례자 요한을 보며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인간은 하느님의 길을 마련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외치는 사람을 저렇게 잔혹하게 죽일 수 있는가? 또 어떻게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어떻게 저렇게 목숨을 바치며 아름다울 수 있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인간의 폭력성은 하늘 나라에까지 이릅니다. 요한 세례자 같은 이들은 연약한 인간이지만 이에 맞서는 아름다운 삶을 삽니다. 하지만 그들이 맞서는 방법은 폭력이나 승리가 아닙니다. 연약함과 패배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당시의 일로만 끝나는 부끄러운 연약함이나 수치스런 패배가 아닙니다. 이것은 후대로 이어지는 “당당한 연약함”이자 “자랑스러운 패배”입니다. 시간이 지나 미래에 피어나는 강함이자 승리입니다. 이것은 과거가 현재를 돕게 하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게 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런 연약함과 패배 속에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못숨을 바친 순교 성인들의 피의 열매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과 순교성인들의 삶과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 선조들에게 빚을 졌고 그 빚은 우리가 받은대로 우리 후대에게 갚아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금 한국의 이 내란 정국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말과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민주주의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쳐 당당한 연약함과 자랑스러운 패배를 맞이했던 선배들의 목숨을 던진 희생 덕분입니다. 죽은 그들이 지금 우리를 돕고 있고, 죽은 그들이 지금 우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잔혹한 정치현실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아름답게 항거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창조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 세례자 처럼 한쪽에서 잔혹하면 우리 쪽에서는 아름다웁시다. 누군가에게 인간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하는 일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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