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마태복음

20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마태 10,17-22 [마음이 다시 빈 구유가 되는, 기다림의 신비]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4. 12. 27. 12:05

20241226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마태 10,17-22 [마음이 다시 빈 구유가 되는, 기다림의 신비]


묵상을 하다 보면 어느 날 우리 마음은 빈 구유가 되어 간절히 기다리기도 하고, 의회와 회당이 되어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합니다.

지난 대림시기 중에 마음과 몸이 고된 시기가 한 동안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기력을 회복하고 오랜만에 고요 속에 묵상하려고 성전에 앉았을 때였습니다. 적막함 속에 고단한 몸과 마음을 잡아매고 앉아 있는데, 불현듯 내가 여기 앉아서 누군가를 이렇게 기다릴 수 있다는 현실이 매우 비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이 기다림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다는 것이 너무나 신비롭게 느껴졌습니다.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가 자신에게 다가올 것을 알게 되고, 또 그 존재를 기다린다는 이 상황을 하느님은 어떻게 창조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내 삶의 어느 순간에 지금 여기 앉아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 너무나 특별하고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지금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어서 깊이 행복했고, 지금 내가 기다릴 누군가가 있어서 덜 외로웠고, 그리고 지금 나의 이 공허하고 고단한 몸과 마음이 머지않아 곧 채워질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 몸과 마음을 꼭 부여잡고 성전에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이렇게 신비로운 것이었나’, ‘기다림이란 것이 이런 마음과 생각까지 만들어 내었던가’. 기다림에 대한 생경한 체험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비로운 기다림의 끝을 맞이한 지금 성탄시기, 저의 마음은 마냥 기뻐할 법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성찰하면서 다시 잠시 어리석음에 빠졌었기 때문입니다.

돌아 본 지난 한 해 걸어왔던 길 위에는 온갖 돌들과 가시들과 꽃들과 열매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습니다. 어딜 딛어도 그중 무엇 하나만 밟을 수 없는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길을 한 해 또 걸어왔습니다. 그 구분할 수 없는 길을 한 해 또 걷는 동안 나는 허망한 것들에 마음이 팔려, 날카로운 곳을 밝고 아파하면서도 정작 밟은 것이 무언인지 진중히 헤아려보지 못했고, 고운 곳을 밝고 기뻐하면서도 그러했습니다. 길 위에 떠다니는 아픔과 기쁨 같은 것들에 마음이 쉽게 홀린 나머지,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고, 무엇을 밝고 가고 있으며, 정말 무엇으로 아파하고 무엇으로 기뻐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묻지 않고 걸어왔습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보지 않고, 하느님을 제대로 듣지 않고, 떠다니는 공허한 것들에 마음은 습관처럼 아파하고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성찰하지 않았으면 그냥 기쁘고 즐거운 성탄이었을지도 모를텐데. 성찰하는 마음은 저를 의회와 회당으로 끌고 갔고, 거기에 어리석음이 더해져 결국 스스로를 채찍질했습니다. 성찰은 자책이 되고, 빈 구유였던 저의 마음은 예수님으로 채워지기도 전에 벌써 의회와 회당이 되고 감옥이 되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나무란다면 이런저런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내가 다그치니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보다 저 스스로에게 먼저 미움을 받았습니다. 성탄절에 만난 어리석은 성찰에서 벗어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만 다행히 하루를 넘기지는 않았습니다. 성탄절 저의 마음은 하루에도 빈 구유와 감옥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습니다.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오랜 기다림 끝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인 오늘 복음과 스테파노 성인의 삶을 통해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의 기쁨을 나누지만 결국 이 기쁨은 고난과 죽음을 향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그 길을 잘 견디는 이는 부활과 구원으로 간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탄시기부터 다시 고난과 죽음을 향한 길을 준비합니다. 앞으로 한 해,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다시 여러 어려움과 또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혹시 그 길 위에서 스스로를 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의 회당과 의회에 가두고 감옥에서 채찍질 하게 된다면, 또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면, 성탄의 기쁨 안에서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줍시다. 그들이 나간 빈자리에 성탄의 기쁨이 가득 비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 충만한 기쁨으로 한 해의 길을 걸어갑시다.

성탄의 기쁨 가득한 우리 마음이 다시 빈 구유가 되는, 기다림의 신비가 여러분의 삶에도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