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1 연중 4주일 묵상강론 마태1,1 - 12 [ 겸손이란 ]

저희 수도회에는 한 분의 성인이 계십니다. 최근에 시성되신 성 피터 토 롯 입니다. 파푸아 뉴기니의 첫 성인이자 평신도 교리교사로서 저희 수도회와 같은 영성을 사는 슈발리에 가족이었습니다. 또 몇 분의 복자들이 계십니다. 오늘은 그 중 한 분 베네딕트 다스와의 기념일입니다.
성 피터 토 롯처럼 복자 베네딕트 다스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부도 수도자도 아니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교사였고, 평범한 평신도 교리교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복음으로 증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를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1990년 남아프리카에서 큰 폭풍이 지나간 뒤,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마을의 지도자들은 이 불행을 미신과 주술로 설명하며 모두가 전통 주술사에게 가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때 베네딕트 다스와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그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고, 그들을 설득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하느님 앞에 서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선택으로 생명을 잃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저는 묻게 됩니다.
“어떻게 한 평범한 사람이 이런 겸손한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
1. 겸손은 나를 낮추는 행동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서는 마음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들아,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스바 2,3)
예언자는 겸손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겸손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 서 있으면 우리는 자신을 남과, 또 남을 남과 비교합니다. 겸손하고자 하면 자주 억울해 지고,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했다고 분노하게 되고, 비교하며 질투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서 있으면 우리는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참 모습을 솔직하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네딕트 다스와가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하느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겸손해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가?”
2. 우리는 왜 겸손을 이렇게 어려워하는가
겸손이 없는 곳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겸손하지 못해서 괴롭고, 남이 겸손하지 못해서 불편해합니다. 겸손이 사라지면 관계가 흔들리고,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겸손을 행동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말을 줄이고, 자신을 감추고, 뒤로 물러섭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앞에 서 있지 않으면 그 모든 행동은 오히려 자신을 더 불안하게 만듭니다. 억울해하고 분노하고 질투합니다.
3. 잘못 배운 겸손 – 그리고 전환의 순간
저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갓 입회했던 시기에 저희 양성소에 방문한 유명한 신학자인 저희 수도회 외국 신부님의 강의를 통역하게 되었습니다. 하루가 끝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신학원장 신부님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는 겸손하려는 마음으로 저와 함께 외국신부님을 수행했던 선배 수사님을 지칭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아니라 누구누구 수사님이 더 잘하셨어요.”
하지만 문제는 저를 포함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수사님의 얼굴도 붉어졌고, 저도 뜻밖의 분위기에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한 인자한 선배 수사님이 조금 굳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칭찬하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왜 그렇게 부정하니?”
그날부터 저는 겸손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여러 감사한 경험 끝에 지금 제가 갖고 있는 겸손에 대한 이해가 방금 말씀드린 것입니다.
겸손은 어떤 행위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겸손은 “내가 나를 작게 만드는 어떤 행동이나 태도가 아니라, 내가 온 마음으로 항상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어려운 도전은 결국 나를 정당하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과 겸손하게 나의 모습을 숨기는 것 사이의 긴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난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모습에 당당하지 못하면, 진실되게 겸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잘난 모습과 또한 나의 부족한 모습을 제대로 알고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때는 내가 사람들 앞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도 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겸손은 가난한 마음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다른 마음들을 용기있게 내려 놓고 하느님을 찾는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1독서에서 스바니아 예언자가 말한 하느님의 법규를 따르며 의로움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 대가는 하늘 나라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되게 겸손한 자는 지금의 세상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4. 가난한 마음 – 겸손의 다른 이름
그래서 예수님은 첫 번째 행복선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마음은 아무것도 없는 마음이 아니라, “붙잡고 있던 마음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는 마음”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그들을 “주님의 이름에 의지하는 사람들”이라 부르고,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하느님은 강한 사람을 택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택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베네딕트 다스와가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5. 겸손이 삶 전체가 될 때
베네딕트 다스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쳤지만 소리치지 않았고, 증언했지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침묵은 도피가 아니라 “신앙의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를 순교자라 부릅니다.
그는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서는 자리를 끝까지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6. 슈발리에 신부님이 가르친 마지막 겸손
그저께 본원 월피정에서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저희 수도회 창립자 쥴 슈발리에 신부님의 겸손에 대한 놀라운 글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슈발리에 신부님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자비와 다른 이들의 공로로 돌리십시오.”
하느님께서 나와 하시는 일을 다른 사람이 몰라도, 세상에서 나만 알아도 괜찮은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내 일로 바꾸지 않는 것. 그래서 다른 모든 마음을 내려 놓고, 하느님 앞에 항상 서 있으려 노력하는 것. 이것이 겸손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겸손을 알기 위해 많은 실패와 함께 해메고 있고, 몸에 익히기 위한 고통 중에 있습니다. 다른 많은 성덕과 같이 겸손을 얻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주님,
저희를 낮추지 말고,
저희를 당신 앞에 서게 하소서.
저희의 이름이 사라져도
당신의 사랑이 남게 하소서.
예수 성심의 마음을
저희에게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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