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

2020년 2월 25일 연중 7주 화요일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0. 2. 25. 13:15

 

 

  5살 때 부산으로 이사 온 후 초등학교 시절 처음 기억에 남아 있는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갔다 와서 어느새 텅 비어있는 방을 봤을 때, 제 마음에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찾아왔었습니다. 어린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아마도 조금은 허탈하고 또 조금은 공허한 그런 상실이나 이별의 아픔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커먼 공간 안에서 귀신이 손을 내뻗을까 기대어 앉아 있으면서도 문득문득 겁내곤 했던 장롱이 있던 자리엔 빛을 못 봐 창백해진 장판의 맨얼굴이 있을 뿐이었고, 그 위로 언제부터 있었을지 모를 녹슨 동전 몇 개가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안 쓴 지 한 참되었지만 할머니가 발을 밟으시며 돌리곤 하셨던 미싱이 있던 자리에는 다리 끝에 눌려 푹 꺼진 자국들도 쓸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며 '잘 있어'라고 인사하며 뒤 보았던 그 방의 세세한 생김은 기억에 남지 않았으나 그 순간의 감정은 아직도 깊이 남아있습니다. 상실, 이별, 아픔 이런 단어들을 더 잘 알게 되는 과정이었겠지요. 그만큼 그 방은 저에게 애증이 서린 소중한 정든 곳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요. 

 

 

  내일이면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는 사순시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향하는 시작이고, 우리의 안식처이신 주님의 빈자리를 체험할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많은 경험이 알려주듯, 잃고 난 다음에야만 발견하게 되는 어떤 소중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처를 잃은 사람은 흔들리는 버스에서 손잡이 없이 두 다리로 버티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과 같습니다. 언제 버스가 어디로 흔들릴지 모든 신경이 가 있고, 혹시라도 망신스럽게 크게 쓰러질까 봐 두 다리에 마음껏 힘을 주고 서 있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음은 고단하기만 합니다. 다음은 '정여울의 문학멘토링'이라는 책을 읽다가 발견한 서정주 시인의 시입니다.

 

 

                     .......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마다 칠해져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

 

 

 툇마루에 앉아계신 할머니한테 달려가 안기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돌리는 서정주 시인의 경험은 꼬꼬마 시절의 저에게도 있었지요. 어떻게 그렇게 크게 느껴졌었을까 크고 나서는 신기하기만 했던 그 품은 이제 제게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온갖 어려움, 이해할 수 없음, 부조리함, 아픔으로부터,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부터 도망쳐가 안길 또 하나의 품을 고등학교 시절 세례를 받으며 갖게 되었지요. 두 개의 품을 갖고 있던 날들이 아프게 그립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여정을 걸어갈수록 남은 이 하나의 품은 조금씩 조금씩 더 커져왔습니다. 그럴수록 주님의 빈자리를 체험할 이 사순시기의 의미도 제게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 중 다음 말씀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제게는 세상의 험난함 앞에 아이가 되어 달리는 이들에게 툇마루에 앉아 기다리는 할머니의 품이 되어 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는 것,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주는 사랑의 방법이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서로에게 체험하게 해주는 사랑의 실천인 것 같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어려움과 두려움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더 필요한 우리의 사명인 것 같습니다.

 

 

 

 

 

< 연중 7주 화요일 독서 및 복음 >

 

 

1독서

 

야고 4,1-10
사랑하는 여러분,
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4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5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
6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9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복음

 

마르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