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

2020년 2월 27일 재의 수요일 다음 목요일 [죽음보다 죽음에 이르는 길이 더 두려운]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0. 2. 28. 00:18

 

 

 

 

죽음이라는 사건은 엄청나고도 급격한, 철저하게 완전한 소멸입니다. 생각과 감각과 시간 자체가 모두 찰나의 한 순간에 모여 없어지는 것. 달리 살았으면 했던 삶과 비교할 것도, 하지 말았을 것을 하고 후회할 것도, 이제 끝이라고 행복해 할 것도 없는, 그 모든 것  의미 자체를 잃어버리는 절대적 찰나의 사건이죠. 그렇기에 어느 교회 학자는 '그 찰나에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수 많은 죽음들을 보며 저 역시 자신의 죽음을 많이 생각했었습니다.  기쁜 날도 많았지만 우울한 날도 많았던 삶이었기에 저는 죽음이 그렇게 두렵진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또 그렇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이상한 죽음에 대한 양가감정을 어느날 이해하게 된 것은, 우습게도 주인공이 범인을 고문하는 어느 미국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면서였습니다. 그 때 알게 된 것은 저는 죽음 자체는 두려워 하지 않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두려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하는 마음의 움직임, 육체의 감각, 그리고 관계의 변화 같은 것들을 겪는 것이 저는 두려웠던 겁니다.

 

  저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제게 죽음은 두려운 것은 아니나 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두렵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이 잘 나오는 영화가 있습니다. 엔도 슈샤큐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입니다. 그 영화 안에는 기치지로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여러번 배교와 회개를 반복하던 그는 다시 한 번 감옥에 있는 로드리게스 신부를 찾아와 고해를 청합니다. 거부하는 신부에게 그는 이렇게 애타게 외칩니다. "몇 년 전이었다면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 때는 박해가 없었어요. 그런데.. 저는 왜 지금 이런 시기에 태어난 겁니까? 너무 불공평 합니다." 그는 고해성사를 허락 받지만 결국 다시 배교하고 맙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 지는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남겨둡니다)

 

  이와 달리 많은 소설과 영화들은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하지만 제게도 그런 행복한 죽음의 과정이 올지 저는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고단'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게 어렸을 적에도 그냥 잠든 채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길 바랬던 밤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이런 생각을 하면, 지금의 사순시기나 십자가의 길이 저에게 갖는 의미의 무게가 더 무거워 집니다. 

 

  한달이 다 지나고서 그저께야 겨우, 새로 이사 온 본원의 제 방 구석에 샇아 두었던 박스 속의 짐들을 풀었습니다. 그동안 항상 조금은 안정이 되지 않던 이유였던 마음 한구석 박스도 치워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거짓말처럼 몸 구석구석이 아파와 잠시 의자에 앉으니 몸이 스펀지 처럼 바닥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순식간의 일이라 감짝 놀라다가 그 순간  죽음이란 이렇게 엄청나고도 급격한, 철저하게 완전한 소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지만 겨우  갖추어진 집기며 풀어 정리한 짐들을 보며, '아 죽음 앞에선 이런 정리며 안정감이며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일까' 라는 생각이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죽음이 생각보다 거대함을 느낍니다. '자신을 죽이라'는 말은아무렇게나 쉽게 할 것이 못됩니다. 사소한 양보라도 쉽지 않고, 내 의견을 거두는 것도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데, 하물려 자신을 죽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또 세상은 그렇게 자신을 죽이는 사람에게 더 가혹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앞에 자신을 죽이는 일은 또 얼마나 기가 차게 어려운 일인가요.

 

그래도

 

우리는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니까요. 그게 나를 위해, 이웃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함께 믿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렇게 다 같이 다짐하고 서로 격려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 사순시기이지 않겠습니까? 생활 중에 아주 작은일이라도 나를 죽이려 애쓰고, 또 주변에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안식처라도 되어 주는 것. 죽음 안에 부활의 희망을 서로에게 심어 주는 일인 것 같습니다. 저도 내일 나의 죽음과 이웃의 죽음에 깨어 있는 하루를 보내려고 합니다. 

 

 

 

 

 

 

 

 

< 독서 및 복음 >

 

 

1독서

 

신명  30,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복음

 

루카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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