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

20200308 사순2주 주일 묵상 - 불공평한 세상을 만나는 방법 -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0. 3. 8. 14:00

  

 

  어려분 삶에서의 중요한 가치들 중 공평함은 몇 번째 정도에 있나요?

  저에게는 꽤 높은 순위에 있습니다. 내가 불공평하게 대우받을 때 느끼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저는 저 나름대로 매우 신중하게 사람들에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거룩하게 변모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도 저의 눈은 함께 올라가지 못한 다른 아홉명의 제자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 세 사람만이 예수님께 선택되어 그런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아홉명의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면서 자기들끼리 누가 더 높은 사람인가로 토론할 정도였으니 그들은 하나같이 열심히 자기 몫을 수행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자기들도 모르는 새 그 중 몇 사람만 그런 특별한 기회를 받았다니, 마음 안에선 실망과 불만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교회나 직장이나 가족 안에서 또 크게는 사회 안에서 그런 생각들이 많이 들곤 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불공평함 때문에 힘든 적이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이렇게 묵상하게 된 계기는 몇일 전 했던 두 번의 통화였습니다. 몇일 전에 한  십년 만에 같이 회사 다녔던 동생과 길게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구닥다리 엑센트로 다섯명 여섯명 다닥다닥 붙어 앉아 기숙사에서 회사로 출근하던 얘기며, 서른 넘은 총각들 열명 남짓이서 김밥 도시락이랑 사이다 싸 들고 공원 잔디밭에 둘러 앉아 이런저런 나눔하던 이야기며(교회 안에서야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밖에서는 흔치 않은 광경이죠^^) 이런 저런 옛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이제 두 명의 아이의 아빠이자 주말부부 남편이며 직장의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그 동생이 "형 이제 나에게는 그런 순수한 마음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 시간이 가고 사는게 그렇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다. 우리 오랜만에 다시 만나면 살아날끼다. 니 안에 그대로 있다.'라고 해주었습니다.

  다음 날 또 희한하게 이 십년 만에 또 대학시절 가톨릭 학생회 후배와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 외국 어느 나라에 출장을 가 있는데, 문자로 '자기는 이제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성당에 다니지 않는다. 하느님이 과연 존재하는지 이야기를 하고싶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금 그런 마음이면 내 이야기라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왜 지금 나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는 말이 '지난 부활절에 외국 어느 나라에서 폭발테러가 일어나 여러명이 죽었는데 자기 동료들도 일정이 변경되지 않았으면 거기서 죽을 뻔 했고, 그 상황에서 열심히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하느님은 어디 있었는지 또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생각이 들어 자기는 하느님이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한 참 얘기를 나눈 끝에 나중에는 '하느님께 잠시 삐진 걸로' 정리 되었습니다.^^

   이 두 동생과 통화를 하고 나서 오늘 복음을 묵상을 하다가 '현실의 불공평함'에 대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두 동생들도 시간과 함께 원치 않게 받게되는 불공평한 상실감, 현실에서 이해하기 힘들 부조리한 불공평함에 대한 아픔을 겪고 있었고, 저 역시도 공동체 안에서 공동의 생활을 해오며 그런 불공평함으로 아픔을 겪고 또 남을 아프게 하고 있어요. 그러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대표적인 불공평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예수님께서는 아마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물어봤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나 엘리야도 대표적인 불공평한 삶을 산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세 분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불공평하기 그지 없는 자신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기도 합니다. 세 분의 삶에는 공통점이 많습니다. 세 분 다 자신의 탄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적게 또는 많게 불공평한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죠. 또 선택된 이라는 책임과 무게로 '왜 하필 접니까?' 라는 질문을 해야 했고, 이는 다른 누군가가 '왜 저는 아닙니까?'라는 탄식을 하게 했습니다. 또 하느님을 믿고 따랐는데 세 분 모두 실패와 배신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 모두 정작 자신들은 삶에서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고 어려운 길을 걸었지만, 정작 그들은 그 고생과 인내의 결과를 못보고 죽습니다. 더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이 죽기 전에 이미 그들의 후계자가 누구이고 정작 영광은 그 후계자들이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죽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여호수아와 엘리사와 베드로는 이 세 분이 일구어 놓고 정작 삶에서 얻지 못한 약속의 땅과 하느님의 백성과 부활의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너무나도 불공평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런 불공평함의 피해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대거 등장하는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면 역설적으로 내가 내 삶의 목표를 무엇으로 해야 하는지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 삶의 목표를 '내 생애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무엇을 이루는가'에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그것에 대해 명확하게 들려줍니다. 제 2독서에서는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2티모 1,8-9)" 우리의 삶의 목적은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렵지만 복음을 실천하기 위한 고난에 동참하려고 작은 애라도 쓰는 우리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나오는 것이라 알려줍니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당신의 목적에 이르는 길이고 부르시는 이유라고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1독서 창세기에서는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다음과 같이 우리 삶의 목적을 알려줍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의 삶은 나만을 향한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모든 시간을 통틀어 또 이 세상의 모든 곳을 통틀어 있는 모든 이를 향한 것이라는 인식을 할 때, 우리가 힘들어 하곤하는 불공평함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바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도 그렇게 살았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겁니다.  거룩한 변모는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여정을 걷다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것의 표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20세기 최대의 작가 반열에 오른 마르셀 포레스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에 있다."  우리 삶의 불공평함을 바라오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신앙의 여정을 간다는 것은 불공평함에 대한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에 있다."  고 할 수 있습니다. 공평함을 실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목표가 거기에 국한 되어선 안됩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든 이를 바라보고 복음의 실천을 위한 고난에 애써 동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불공평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나올 것입니다. 거기서 선교의 힘이 나올 것입니다.  

 

 

< 독서 및 복음 >  

1독서 창세 12,1-4ㄱ

그 무렵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2독서 2티모 1,8ㄴ-10

사랑하는 그대여,
8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9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복음  마태 17,1-9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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