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요한복음

20220407 사순 5주간 목요일 요한 8,51- 59 “어떻게 믿을 것인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2. 4. 6. 22:22

 

20220406 사순 5주간 목요일 요한 8,51- 59
 “어떻게 믿을 것인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오늘 우리가 지내고 있는 사순 5주 한 주간의 복음들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시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단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도 반복해서 알려주십니다.

가톨릭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서 조금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 이번 주간의 복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가장 핵심이며 정수가 되는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만약 여러분 이 문제가 여러분의 삶에 절체절명의 중차대한 문제가 되는 때에는 성경의 여러 곳을 찾아다니기 보다, 이번 한 주간의 복음들을 연이어 묵상해 보시면 많은 도움을 받으실 수 있으실 거라 확신합니다.

...


이번 사순 5주일 복음을 돌아봅시다. 사순 5주일의 복음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서 단죄하지 않으시고 다시 죄짓지 마라고 이르시는 내용입니다.

먼저 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봅시다. 이 문제를 위해 붙잡혀 온 여인을 한 번 봅시다. 여러분 여인은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여인이 한 말은 단 하나 입니다.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이 말 외에는 여인이 예수님을 믿었는지 여인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는지 심지어는 그런 눈빛을 보냈는 지도 성경에는 전혀 나와있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 여인이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진 않은 것이고, 이 여인이 이 일을 겪은 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 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의 삶은 우리에게 한가지 확실한 메세지를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믿을 것인지도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그저 하느님 앞에 데려다 지는 존재, 또는 하느님께서 찾아 오시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믿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기다릴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행복, 슬픔, 고통, 공포 속에서 그저 기다릴 뿐입니다. 우리는 살다가 하느님을 기다리기 시작하게 되었고, 기다리는 동안 하느님을 알아가기 시작하게 되었고, 하느님을 알아가는 동안 믿음을 갖게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강하냐 약하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다림의 문제입니다. 오랜 기다림에 머무는 문제입니다.


다음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봅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인을 데려온 사람들을 봅시다. 그들은 해야 한다고 믿는 율법들을 실천하며 삽니다. 신념에 충실한 것은 고결하고 숭고한 자세입니다. 대단한 결의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신념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악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 여러 논문을 읽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가 유태인들을 학살하기위해서 이동시키는 데에 협조했던 많은 독일의 시골 노인 분들이 죽을 때 까지도 자신이 한 일이 잘 못된 것이라 생각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애국이라는 신념을 실천했지만 그것은 고결하지도 숭고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치들이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념을 올바르게 실천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을 데려온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메세지를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는 그것에 따라 생각해보고는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같은 내용을 놀랍게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그분을 알고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며 듣고, 묵상하며 생각해야 합니다. 듣고 생각하는 행위가 없는 신앙의 실천은 쉽게 악에 가까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결국 말씀을 기도하며 듣고 묵상하며 생각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구원 받을것인가 하는 문제를 봅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늘 복음 말미의 예수님의 모습을 한 번 봅시다. 말미에 예수님은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십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숨겨 도망가십니다. 그것도 하느님의 집인 성전으로부터 말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이미지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갑니까? 몸을 숨겨 도망가니 부끄러워 보이지 않으십니까? 당당히 맞서지 않고 도망가니 비겁해 보이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당당히 목을 내어 놓은 세례자 요한과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용감하게 순교한 여러 선배 신앙인들의 모습과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이 순간 만큼은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우리도 모르게 하고 있는 공통적으로 하고 있는 행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 나의 시간에 나의 기준으로”입니다. “내가 지금 생각하기에 내 기준으로 나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은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시간과 기준이 필요하도록 창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시간과 기준은 보통 우리의 이성과 지성 너머에 있습니다. 우리들 중 누군가의 시간과 기준으로만 본다면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도, 그 여인을 잡아온 사람들도, 그리고 몸을 숨기고 성전에서 도망쳐 나가는 예수님의 모습도 절대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여인처럼 잘못할 수도 때로는 그녀를 데려온 사람들처럼 어리석을 수도 그리고 때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처럼 몸을 숨겨 하느님의 집으로부터 도망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내가 구원받지 못할 존재라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하느님의 시간과 기준은 우리의 것과 다르지만 언제나 우리를 위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받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하느님의 시간과 기준의 문제이고, 그것은 보통 우리 이성과 지성 너머의 문제이므로, 결국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우리의 믿음에 맡겨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 됩니다.

“ 어떻게 믿을 것인가? 오랜 기다림에 머무는 문제이다.”
“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생각한 후, 실천해야 한다.”
“ 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느님의 시간과 기준이라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 너머의 문제이므로 믿음에 맡겨야 한다.”

이번 사순 5주간의복음들이 전하는 메세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이 문장과 함께 의미 깊은 사순 5주간 보내시길 빕니다.

“ 하느님에 대한 오랜 기다림에 머물며,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생각한 후 실천하며, 믿음에 맡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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