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서 낙서하기/맙소사인삶

20240111 놀이터에서 낙서하기 [ 그에게는 비탄도 눈물도 없이 강인하게 자기 삶을 꾸려가는 힘이 있었다. ]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4. 1. 11. 14:39

[ 그에게는 비탄도 눈물도 없이 강인하게 자기 삶을 꾸려가는 힘이 있었다. ] 

 

 

 

그에게는 비탄도 눈물도 없이 강인하게 자기 삶을 꾸려가는 힘이 있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그의 삶에서 그는 비탄하고 눈물을 쏟고 있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그도 지금처럼 되기 전 옛날에는 나처럼 비탄에 빠져 눈물로 점철된 날들을 보낸던 적이 있진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누구누구는 어릴 때부터 이미 성인같았다던가 누구누구는 항상 성인같이 산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흑역사는 반드시 있다. 그럼에도 그를 보면 가끔 이런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이다.

그의 어린시절을 나는 가끔 짖꿋은 마음으로 상상해 본다. 지금의 모습과 비교해보는 건 솔솔한 재미가 있다.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나, 선생님에게 혼나는 모습이나, 아니면 누가 그의 기저귀를 가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때의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때의 그는 나중에 커서 지금과 같은 모습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고는 있었을까? 도대체 그는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그가 되기 시작했을까? 언제부터였을까를 묻는 것은 우스운 질문이 될 것이다. 시작은 그가 잉태되었을 때부터였을 테니까. 혹은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였을테니까.

그의 노년시절도 나는 가끔 질투섞인 마음으로 상상해 본다. 이해 안되는 젊은 세대에게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실연을 당해 망연자실 술잔 앞에서 눈물을 쏟는 모습이나,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하염없이 약해지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때의 그는 어떤 추억을 그리며 살고 있을까? 그는 언제까지 지금의 모습대로 살아갈까? 그리고 그 추억 속에 나는 얼마나 많이 자리하고 있을까 묻는 것도 우스운 질문이 될 것이다. 그는 서른 세살이 되던 해에 죽었으니까.

나는 가끔 그의 40대를 그려본다. 나는 여전히 자주 비탄에 빠지고 쉽사리 눈물을 흘린다.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그에게 있었던, 비탄도 눈물도 없이 강인하게 자기 삶을 꾸려가는 힘을 나는 오늘도 꿈꾼다. 그리고 아마 내일도, 내년도, 십 년 후에도 여전히 나는 꿈꾸고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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