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면 마 됐다. 다음에 보자]
20250222 연중 6주 수요일 묵상강론 마르 8,22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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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면 마 됐다. 다음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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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너머 아버지의 말에 나는 어정쩡하게 알겠다고 하고 끊었다. 내일 서울에 어머니와 여관을 잡을 테니 저녁에 소주 한잔 하자시는 거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일, 어머니의 수술 후 경과를 보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하루 올라오신다. 그 참에 한 번 보자는 말씀이시다. 강남은 밤에 다시 수도원에 돌아오기는 너무 머니, 수도원 근처로 와서 저녁 먹고 손님방에서 주무시라는 나의 권유에 대한 단칼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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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해야하는 일이 죽고 사는 일이가? 만날 수 있을 때 많이 만나라. 늦으면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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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기 전후로 한참 동안 내 마음에 이 말이 맴돌았다. 그래도 ‘그렇게 무리해서 볼 일인가’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이제 머지않은 오는 봄에 부산에 한 번 갈 일도 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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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로 하루를 보내다 틈이 나 좋아하는 책을 오랜만에 꺼냈다. 목차를 보고 마음이 가는 곳을 펼쳐 들었다. 그랬더니 평소에는 그렇게 찾으려고 책장을 흩넘겨도 눈에 잘 띄지 않던 시가 몇 장 넘기지 않아 툭 내 앞에 나왔다. 그런데 그만 짧게 인용된 이 시를 채 다 읽기도 전에 나도 몰래 눈물이 쏟아졌다. 손택수의 시 주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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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고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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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아버지의 등을 밀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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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자국이 남아있진 않지만, 해 지면 달지고, 달지면 해를 지느라 쳐져 내린 등을 한 아버지는, 부끄러워 더 말 못 하고 전화를 끊었던 거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몰랐던 거다. ‘그러면 마 됐다. 다음에 보자’라는 말이 ‘임마 많이 보고 싶다’라는 말이라는 걸.
그리고 나는 오늘 또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손길과 말을 못 알아듣고 지나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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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묵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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