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마르코복음

20250122 연중 2주 수요일 마르 3,1-6 [예수님의 분노와 슬픔을 묵상하기 위해서는]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5. 1. 22. 22:52

20250122 연중 2 수요일 마르 3,1-6 [예수님의 분노와 슬픔을 묵상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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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고해소에서 잘못 고해하셔서 안타까운 내용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관한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대로 다죄인 것은아닙니다. 예를 들어 질투, 분노, 시기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고 해서 그대로 죄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감정이 마땅히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제라고 하는 것이 더 마땅할 것입니다. 마치 소설 『이방인』의 한 장면처럼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가서 눈물은 커녕 일말의 슬픔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머리 속에 그려보면 너무나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해친 사람을 보고 미움이나 분노를 느끼지 못하고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소름끼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감정은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의 건강한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어떤 종류의 부정적 감정들은 인간으로서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위해 더 높은 가치를 위해 더 필여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분노와 슬픔에 대해서 한 번 살펴봅시다. 성경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예수님을 어렵지 않게 만납니다. 슬퍼하는 예수님은 또 어떻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성심의 선교사로서 저는 이 예수님의 감정을 정성들여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분노, 특히 슬픔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노기가 서려있습니다. 사랑의 실천보다 규칙의 실천에 지나치게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다. 의로운 분노다. 또 예수님의 마음에는 슬픔이 서려있다.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분노에 대해서는 안식일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그들을 노기를 띠고 둘러보며 그대로 표출하신다. 하지만 당신의 슬픔은 그렇게 드러내지 않으시고 그저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손을 뻗으라고 말씀하신다. 불구자는 치유받았지만,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의 예수님에 대한 적의는 임계점을 넘게 됩니다. 그들은 이때부터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 상황을 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특히 말 못한 그 슬픔은 어땠을까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말 못할 슬픔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다른 사람의 슬픔 , 특히 말 못할 다른 사람의 슬픔을 헤아려 본다는 것은 어떤 일인 것일까요?

"누군가의 알지 못 할 슬픔이란 수천 년 동안 어딘가에 놓여 있는 돌멩이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풍파를 겪으며 어딘가 오롯이 있을 것이다. 슬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돌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두고 돌의 등고선을 읽고 돌의 시간을 헤아리는 것과 같다." 이 문장은 김 소연 시인이 존 케닉의 『슬픔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에 대한 쓴 추천사 중에서 있는 문장입니다. 세상 어딘가에서 놓여 풍파에 깍이며 오랫동안 등고선을 몸에 새겨온 돌처럼, 우리도 세상 갖은 풍파에 말 못할 슬픔을 우리 몸 안에 새기며 세상 한 구석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 못할 슬픔을 헤아린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오히려 돌의 등고선에서 공명 없이 돌아오는 내 시선을 마주 보며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알려지지 않은 슬픔을 헤아리는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 슬픔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내 시선의 공명도 각인된 슬픔의 외침도 결국은 돌의 등고선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말 못 할 예수님의 슬픔 또 내 이웃의 슬픔을 헤아려보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의 슬픔과의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의 슬픔을 만나고 그 슬픔 앞에 힘없이 무너지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 안으로 돌아온 내 시선의 공명과 내 안에서 들리는 슬픔의 외침 앞에 담담히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이들과 예수님의 슬픔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고 더 닮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더 잘 만나고 깊이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하루 복음말씀과 함께 예수님의 슬픔과 분노를 묵상하며 우리 자신의 감정을 더 잘 만나주는 하루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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