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

20200420 부활 2주 월요일 묵상 - 많은 것을 담는 작은 것 -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0. 4. 21. 11:23

 

 

 

 

오늘 아침 미사 중 알렐루야를 바치다가 문득 이제 사순시기가 끝나고 부활시기가 되었구나 새삼 느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사순시기 동안의 전례 중에는 종을 친다거나 대영광송을 바친다거나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사순의 의미를 깊이 느끼고 기억하기 위해서 입니다. 신학교 전례수업 시간에 신부님께서 쉬지 않고 반복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미사 전례 중에 경본에 쓰여 있는 것들 단어 하나라도 함부로 바꾸면 안됩니다. 문장 뿐만 아니라  단어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과 신학자 평신도 들이 피를 흘리고 땀을 흘렸는지 아시죠? 단어 하나를 잘못 바꾸면 우리가 믿는 교의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잘 알려진 필리오케 논쟁이 있지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나오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부분에서 "성자에게서(필리오케)" 라는 이 한 단어는 엄청난 신학적 논쟁과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서방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가 분열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말 경본의 한 단어라도 정말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묵상글 나누는 이곳에 어려운 신학적 이야기는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의 단어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지를 환기해보는 거예요. 그리고 알레루야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고, 지금 부활 시기가 시작되는 이 쯤에 그래도 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공부삼아 간단히 정리해 두려 합니다.

알렐루야(Alleluia)의 히브리어 어원은 הָלַל(halal, 빛나다 찬양하다), יָהּ, (Yah,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이름) 이고, 그리스어로는  Ἁλληλούϊα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라'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에서는 특히 시편에, 신약에서는 요한 묵시록에  나옵니다. 주로 특정 시편의 시작이나 마침 또는 시작과 마침에 자주 등장합니다. 전례적인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시편들은 '알렐루야시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신약에서는 요한 묵시록 19장에서 에서 하늘의 거대한 무리, 군중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며 외치는 소리로 사용됩니다.

또 알렐루야는 우리들이 한 번 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노래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밥 딜런과 함께 팝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던 레이널드 코헨의 '알렐루야'는 다양한 해석을 낳지만, 기본적으로 부하의 아내를 얻기 위해 부하를 전쟁터에 내몰아 죽인 다윗이, 나중에 자신의 인간적인 부족함을 탄식하며 하느님께 참회하는 내용입니다. 들으시면 아마 '아!' 하실 거예요.

 

예전에 양성소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한 수사님과 좀 다툰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 참의 시간이 지난 어느날 혼자 엄청 많은 설거지를 낑낑 대며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옆에서 함께 하기 시작하시는 거예요. 설거지를 다 끝낼 때까지 우리는 서로 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싱크대의 마지막 남은 물기를 훔쳐 낸 걸레를 널면서 처음 마주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시익 웃었습니다. 때로는 더 많은 것을 나타내고 싶을 때 더 적은 것이 필요합니다. 

 

그날의 그런 시익 웃는 웃음처럼, 알렐루야는 나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서 보다 많은 것을 넉넉히 담기에 충분한 하나의 단어입니다.

 

알렐루야

 

사순시기 동안 아껴두었던 이 알렐루야를 미사시간에 또 일상 중에 잘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만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혹시 내가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찾고 있거나 사용하고 있는지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알렐루야

 

 

 

 

 

 

부활2주 월요일 독서 및 묵상읽기(가톨릭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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