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

20200414 부활팔부 화요일 - 수도자의 얼굴은 어때야 하나요? -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0. 4. 14. 18:19

 

 

 

 

 

아침 조회를 시작하시는 차장님의 얼굴은 굳어있었습니다.

"어제 부장님께서 말씀하셨어요. 회사 본관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보는 곳이 우리 부서인데, 우리 부서 사람들 얼굴이 너무 어둡고 무섭다는 피드백이 다른부서로부터 많답니다. 오늘부터 표정에 신경쓰세요. 밝은 얼굴로 일합시다."

재무 관리부서라는 곳은 원래 사람들이 편하게 느끼기 어려운 곳입니다. 제가 입사하기 겨우 몇 년 전만 하더라고 여러 현업부서의 계약직 행정사원들이 재무전표를 들고 와서는, 하루도 울고 가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여기선 작은 실수 하나라도 틀리면 결재를 안해주는데, 그 사원 입장에서는 그런 작은 실수 때문에 다시 자기 부서로 돌아가 수정해서 다시 뽑아서 그걸 대리, 과장, 차장, 부장님까지 다시 일일이 결재를 받아 와야 했으니, 그들에게 이곳은 편한 마음으로 올 수가 없는 곳이죠. 

어느 부서에서 일하든 회사에서 웃으면서 일한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항상 밀려 있는 일, 보고하기 곤란한 건들, 실수해서 말못하고 알아서 메꾸어야 하는 일, 이유없이 괴롭히는 사람, 함께 있기만 해도 숨막히는 사람. 이런 일들과 사람들과 함께 정신없이 있다보면 자기 얼굴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생각할 틈도 없죠. 다른 사람의 얼굴이 무뚝뚝한 건지, 화나 있는 건지, 무언가 고민이 있는 건지 알아차리기도 어렵습니다. 알아차린다 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걸고 들어 줄 여유가 있는 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팍팍한 일과 중에 이제는 얼굴에 웃음도 지어야 하는 업무가 추가된 겁니다.

 

" 수도자는 얼굴이 어두우면 안됩니다. 수도자의 삶은 천상의 삶의 예표 입니다. 수도자의 얼굴이 행복하지 않으면 수도생활 잘못하고 있는 겁니다."

한참 공동체 생활에 힘들어하는 시기에 어느 선배 수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이제 얼굴에 웃음까지 띄어야 하는 소임이 추가된 거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회사생활이나 수도생활이나 똑같은 건가 좌절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은 "얼굴에 평정심이 드러나야 한다"고 하시고, 어떤 분은 "수도자의 얼굴은 항상 고행하는 얼굴이어야 한다" 하십니다. 수도생활의 핵심은 표정관리인건가 라는 자조섞인 농담도 했었지요. 도대체 수도자의 얼굴은 어떤 얼굴이어야 하는걸까요?

 

사람들은 모두 각자 다른 이상형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상형에 가깝지 못한 스스로의 모습 때문에 괴로워 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상형을 현실에서 못찾거나 그런 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다며 허무해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는 그런 것을 아예 갖지 않고 되는대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살다가 이상형이 바뀌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은 삶이지만 그동안 살다보니 하나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노력이나 운으로 한 번 유명해 진 배우도 실력이 없으면 조용히 사라지는 것 처럼, 어떤 경지라는 것은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수도자의 삶은 항상 괴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더 잘 볼일수록 조금이라도 부족한 지금 자신을 볼 때 마다 어려움을 볼 때마다 괴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또한 수도자의 삶은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걸어왔고 또 지금 걷는 길에서 조금이라도 성장해온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마다 기쁘고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 행복해 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원히 안될 수 도 있고 바로 지금이 될 수도 있다'일 것 같습니다. 내가 어디를 보는가의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없어진 예수님의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성장해 가는 수도자가 다시 퇴보한 것 같이 느껴지는 자신에 모습이 힘들어 하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만났던  예수님이 하루 아침에 없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그렇듯 그의 곁에 계셨고, 누구를 찾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그는 계속해서 엉뚱한 곳에서 하느님을 찾습니다. 예수님은 왜 우느냐 라고 물으신 다음, 다시금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라고 조금 더 세밀하게 물으신다. 수도자가 자기 안의 예수님의 부재 때문에 괴로워 할 때 계속 이런 질문을  만납니다.

"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그러나 우리는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 항상 질문이 온 곳에 있다는 것에 자주 잊습니다. 또한 우리는 답을 찾는 시점에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찾아 헤매다가 문득 '누구야'라고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비로소 고개를 돌려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고백합니다 '라뿌니!"  그리고 그때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쉽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조금 더 성장하면 예수님을 더 잘 만나고, 예수님을 세상에 더 잘 전하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증거하는 것은 나의 성장의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러 주셨을 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자연스레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성장했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났기 때문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장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잘 증거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록, 거기에는 예수님이 아니라 더 많은 내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성장에 대한 기대와 의무감을 놓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부르시는 분 목소리를 듣게 되고, 내가 그분을 찾는 곳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그분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성큼 성장해 갈 것이고, 괴로움 중에서도 지금 진실한 행복의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수도생활에서도 말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걷는 이 길고 긴 아픔의 시간 중에서도 부활의 기쁨을 기억하고 나눌 수 있는 의미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부활팔부 화요일 독서 및 복음 읽기 (가톨릭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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