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

20201008 연중 27주 목요일 묵상 - 복음적인 가난함이란 -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0. 10. 8. 16:01

 

 

오늘 독서는 유다인의 종교가 세계의 종교로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는 아주 극적인 전환장면을 보여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율법을 따르는 행위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어서 받는 것'이라고 외칩니다. 이 장면은 유대교로부터 그리스도교가 분리되어 나오며 만든 엄청난 전환을 보여 줍니다. '율법준수행위'에서 '복음을듣고믿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특별히 '듣고믿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유다인 뿐만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도 열려있다는 유다교와는 다른 그리스도교만이 가진 매우 특별하고 고유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이는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고, 그리스도교를 공적으로 탄압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라티아서 3장의 바오로의 이 이야기는 이 구절 직전 나오는 또 하나 흥미로운 장면에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갈라티아서 2장에서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지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각자 어떤 소임을 맡아 일할 것인지 결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협의 끝에 그들은,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유대인들을 향해,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민족들을 향해 선교의 길을 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어 문제의 장면이 나옵니다. 각자의 소임을 다하며 지내던 어느 날 바오로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공공연하게 베드로를 거세게 비난 합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베드로와 바오로는 선교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바오로에 비해 베드로는 유다인으로서의 전통과 율법을  강조하며 이민족들이 그것을 따를 것을 강조하는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베드로의 이러한 다소 닫혀진 선교의식과 함께 스스로는 지키지 않으며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위선적인 모습도 비난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모인 공동체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또 어느 곳에서나 비슷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보게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사도들 역시도 각자의 생각이 다 달랐고, 서로 서로의 모습에 실망하거나 비판하기도 했고 또 시행착오도 겪어갔다는 것을 오늘 독서를 통해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강론을 준비하며 하나 이전에 알아채지 못했던 매우 인상적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조금 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각자가 선교대상에 대한 소임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각자 생각이나 취향이나 선호가 달랐지만 그들이 하나 공통되게 하자고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각자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는 말의 말미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갈라 2,10)

 

가난한 이들을 위한 마음은 그들 선교의 길에서 다른 무엇과 바꾸거나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없는 유일하고 최우선의 소명이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우리 가톨릭 정신의 핵심입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복음의 기쁨 195항 등에서 강조하셨고, 저희 수도회 회헌 4절 복음적 가난의 48항에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가난이란 어떤 것인가, 가난한 이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우리를 깊은 성찰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밤 중에 친구를 찾아와 빵을 청하며 졸라대는 이, 즉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이를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처럼 하느님께 청하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가난은 부유와 비교한 절대적 빈곤상태를 말하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필요로 하나 구할 수 없는 모든 이를 포함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의 삶을 실천하는 단순성은 내가 필요로 하고 편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조금 멀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10가지를 누릴 수 있다면 여덟개 정도만 누리는 것, 내가 조금 더 편할 수 있는 것들을 매번 선택하지는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을 내 이웃을 위해 하는 것. 그렇게 스스로 가난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가 청하여 얻어내는 가난을 충족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어쩌면 더 하느님의 길에 가까이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갈등도 분명히 훨씬 줄어들겁니다.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삶으로 들어가며 하느님 체험을 하는 삶을 사는 것도,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청해 받으며 하느님 체험을 하는 삶도 모두 은총의 삶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가지 중 어느 삶이든 성령을 청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청하면 하느님께서 꼭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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