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

20201018 연중 29주일 복음 묵상 - 지상에서 성자 임무가 끝나가던 날 -

놀이터에서 묵상하기 2020. 10. 19. 00:23

 

오늘 복음은 이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소명이 거의 완성되는 중요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셨고, 공생활 끝에 수난받아 죽으셨고, 그리고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넘겨주셨습니다. 이제 승천하여 성령을 보내주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될 성자의 이 지상에서의 임무는 이제 마지막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엄청난 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양심은 싸우고 있고, 세상에는 불의가 넘치고 있고, 약하고 가난한 자들은 변함없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성자의 지상에서의 임무가 거의 완성된 단계에 이르렀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 했던 몇 가지 기대들이 있었습니다. 보통 기대는 자기의 약한 점이나 욕망과 관련되어 있지요. 저의 기대 중 하나는 노래를 잘 부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 부터 노래를 듣는 일도 많지 않았고, 소리내어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던 저는 제대로 음을 낼 줄도 몰랐고 박자를 맞추어 일정하게 뭔가 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반복되고 누적되는 실패감와 당혹감 그리고 주변의 반응들에 수치스러웠던 기억들은 점점 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더 두려워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제가 된다는 생각을 할 때 제일 걱정 된 것들 중 하나도 미사 때 제대에서 대영광송 같은 노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원과 신학교 생활을 하면 노래 부르는 일이 많을테니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겁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지금 저는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건 지금 제가 아주 잘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과거에 워낙 형편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에 기인한 바가 더 큽니다.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지요. 이런 저의 모습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는 각자 기대하는 바가 있었을 겁니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 스타의 가사 처럼, 와인잔을 기울이며 복음서를 쓰는 안락하고 영광스러운 노후를 기대했던 제자도 있었을 겁니다.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에서 큰 자리에 앉는 것을 기대했던 제자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처럼요.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어떤 희망을 가지고 오늘을 사랑야 하고,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선교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저는 오늘 복음의 이 말씀에서 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이건 저의 빨래 입니다. 어제 제가 아침에 바쁘게 바깥 경당 지붕위에 건조대를 빨래를 널고 나갔다가 일정이 늦어져서 밤 늦게 돌아왔는데, 이것이 제 방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느 선배 신부님이 늦는 저를 위해 몰래 해 주신 것이지요.   

 

 

 

매주 수요일 받는 교육이 있는데 온라인에서 줌으로 하다가 이번 주 부터 대면수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조심하니라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면서 도시락을 싸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모르고 있던 저를 위해 어느 수녀님께서 싸주신 도시락입니다. 얼마만이던지요 누군가 싸 준 도시락을 먹는 것이.

 

 

 

 

 

그저께 친구가 느닷없이 톡으로 보내 준 아주 오래된 옛날 사진입니다. 사진은 참 요상하지요. 이 한장은 지난 오랜 시간 안에 담겨 온 것들을 한 순간에 다 돗아나게 하고 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제 안에 일으켜 세우니 말입니다.  

 

 

 

 

어릴 적 문방구점 앞에는 항상 이렇게 백원짜리를 넣고 무언가 빼내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엊그저께 본원 근처의 수녀원에서 수녀님들과 미사를 드리고 오는 길에 옛스런 문방구점 앞에 무려 열 두개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 한 꼬마가 손에 오백원 짜리를 쥐고 어디에 넣을지 고민하며 서 있었습니다. 그 꼬마를 저는 한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것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제가 저를 찾아 함께 하셨던 예수님을 만난 순간들이었습니다. 무엇때문인지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지나고 나서 묵상하면 그 순간들에 예수님께서 저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떠날 때의 제자들 처럼, 또 입회할 때의 저처럼 처음 가졌던 기대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예수님은 제 빨래에 담긴 형제의 사랑의 손길에서, 애정어린 도시락에서, 친구가 보내 준 오랜사진에서, 그리고 오후의 어느 길가 문방구 점 앞에서 저를 찾아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아니, 함께 계시다는 걸 그 순간들에 알아채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시작은 나의 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에서 시작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자주 알아차리는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가진 핸드폰이나, 내가 사는 방이나, 주고 받는 배려에서, 또 문득 걷고 있던 어느 길가에서 자주자주 예수님을 알아채는 한 주간의 시간 우리 함께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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