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1 20241021 연중 29주 화요일 묵상강론 루카 12,35-38 [전쟁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기다림]
등불을 켜 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주인이 올 때 까지 깨어서 기다리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기다림은 어떤 때는 매우 감미롭고 로맨틱하며 깊은 마음의 움직임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따뜻한 봄바람이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때는 견딜 수 없이 무겁고 고통스러우며 마음의 마지막 조각까지 떼어서 불을 때야 하는 혹독한 추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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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서 가톨릭에 입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가톨릭 교회에 다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성당에 다니는 큰 이유들 중 하나로 마음의 평화를 듭니다. 전례의 경건함이, 예수님의 말씀이, 설교가들의 영감이 우리의 마음에 평화를 주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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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그런 평화를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평화로운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평화로울 틈이 없습니다. 내 마음도 끊임없이 크고작게 요동치고, 내가 있는 공동체의 사람들의 마음도 끊임없이 크고작게 요동칩니다. 우리는 그 끊임없는 파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다리다 보면 등불은 자꾸 꺼지고, 등잔은 점점 무거워지며, 때가 되면 반드시 잠은 옵니다. 그러니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깨어서 기다리려면 얼마나 애가 쓰이고 진땀이 나는 일입니까? 등불을 켜고 밤새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마음이, 손에 등불을 쥐고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런 마음이겠습니까?
만약 내 마음이 평화롭기만 하다거나, 풍파에 잘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거나, 또는 항상 선명하게 식별하고 살고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그런 평화로움과 안정과 식별은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고난에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을 빨리 다시 알아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많이 소유하지 않고 살고 있는 수도자의 두 가지 다른 모습을 알아채는 일과 같습니다. 가진 것 없이 살려는 고행을 선택하며 불편함과의 전쟁 속에 매알을 사는 수도자가 있습니다. 반면 언제나 필요하면 살 돈이 있거나 원하면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쓰고 버리고 굳이 미리 사두지 않는 수도자도 있습니다.
이 두 수도자들을 겉으로 보기에는 다 청빈해 보이지만 전자는 매일을 힘겨운 전투 속에 살고있고, 후자는 매일을 평화와 안정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둘 중 누가 등불을 켜 놓고 깨어서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의 삶에 가깝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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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의 삶은 고단하고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애를 많이 써야 하는 삶입니다. 그래도 그 삶을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희망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렇게 애를 씀에도 잘 되지 않는 아픔과 괴로움을 알아주시는 분이 위로의 성령이십니다. 그 애씀이 쓸모없다고 몸소 보여주신 분이 성모님이시고 요셉 성인이십니다. 어쩌다 내가 잘 났다고 착각하고 사는 동안 시련과 고난으로 일깨워 주시는 분이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등불을 들고 유유히 골목을 거닐며 휘파람을 부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삶은 꺼진 옆사람의 등불에 불을 옮겨 주고, 무거워 손이 처지는 뒷 사람의 등잔을 같이 들어주며, 어느 틈에 힘들어 잠든 앞 사람을 대신해 가만히 등불을 지켜주는 그런 파도의 삶이고 애씀의 삶입니다.
그 전쟁통 속에서 서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나누는 기다림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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