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이 속삭여 주시는 마음의 그림소리 273

20240412 부활 2주 금요일 묵상강론 요한 6,1-15 [언덕 위 서커스와 새우깡 그리고 할머니]

시골에서 부산으로 이사온 것은 다섯 살 때였습니다. 그 때는 하얀색 고무신을 신었었데,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초등학교를 들어가서도 저는 그 신발이 편하다고 계속 하얀 고무신을 고집했다고 합니다. 놀이터 모래밭에서 제 신은 언제나 친구들의 배놀이 도구였습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지만 집 뒷편은 미나리깡이었고, 길건너는 옥수수 밭이었습니다. 아주 나중의 일이지만 할머니는 거기서 작디작은 미키마우스 시계를 주웠다면서 주셨고, 태엽을 감아도 더 이상 돌지 않게 된 그 시계를 저는 대학시절까지도 소중히 간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시절 우리에게는 손목시계가 없었습니다. 골목 건너 비닐하우스로 대충 만든 와이셔츠 공장에서 일하시던 할머니를 위해 어머니는 제게 매일 점심 때가 되면 공장으로 가 할머니에게 식사하러 오시..

20240412 부활 2주 금 묵상강론 요한 6,1-15 [ 계속 살아간다는 것 ]

⠀ ⠀ ⠀ 예수님은 열 두 광주리가 가득 찰 정도 만큼으로 기적을 행하셨다. 적당한 지점이겠지. ⠀ 이 적당한 지점을 나는 그림을 그릴 때 매번 고민한다. ⠀ … ⠀ 더 멋있고자 선을 더하면 조잡해 질 것이고, 그냥 두면 허술해 보인다. ⠀ 더 비슷하고자 개체를 더하면 답답해 질 것이고, 멈추면 없어 보인다. ⠀ 더 자연스럽고자 힘빼고 그리면 더 약해 질 것이고, 정성껏 그리면 가식적으로 보인다. ⠀ 내 그림은 항상 그랬다. 내 삶도 그랬다. ⠀ … ⠀ 선이나 개채를 더하며 힘을 빼고 그려도 ⠀ 허술하지도 조잡하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없어 보이지도 않으며, 약하지도 가식적이지도 않으려면 ⠀ 계속 그리는 수 밖에 없다. ⠀ 힘들어도, 싫어도, 또는 절망스러울 때도. 비가 오거나, 벚꽃이 지거나, 또는 실연..

20240409 부활 2주간 수요일 묵상강론 요한 3,7ㄱ.8-15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기상청에서 야유회를 잡은 날은 비가 온다." 이런 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하도 기상예보가 맞지 않아서 하는 이야기이죠. 수많은 날씨 박사들이 열과 성을 다해 이뤄놓은 업적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여전히 우리 인간의 능력은 많은 한계 안에 있는 듯합니다. ... 그런데 이것을 인간의 능력이라고 해야 할지, 기계의 능력이라고 해야 할지 조금 헷갈리는 기사를 얼마 전 보게 되었습니다. "기상예보 AI가 전통적인 기상예보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날씨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고안한 기상예측 방정식에 기후 관련 수치를 대입해서 해답을 얻는 전통적인 방식과 달리, 지난 AI는 40년 간의 날씨패턴을 학습해 1분도 안되어 10일 치 기상을 예측해 냅니다." 기사에 따르면 AI를 사용한 기상..

20240311 사순 4주 월요일 묵상강론 요한 4,43-54 "사랑의 완성은 알아챔"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세상에 너 한 사람만이 남아 있다 해도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주셨을 거야." 마음이 잠시 멈추었습니다. 하느님은 너를 사랑해라는 말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리고 한참 생각했습니다. 정말 나 하나만 이 세상에 남아 있어도, 하느님은 나 하나만을 위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의 길과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도록 보내주셨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 말에 곰곰이 머무르며 내 마음의 움직임과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봤습니다. .. 여러분도 잠시 멈추고 이 말을 여러분의 마음에 두고 거기서는 어떤 움직임과 소리가 들리는지 잠시 귀 귀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솔직한 내면의 소리는 무엇입니까? 당연하지라고 들려온다고 믿음이 깊다거나 오만하다..

20240307 사순 3주 목요일 묵상강론 루카 11,14-23 [ 일치는 끊임없는 나와의 싸움 ]

오늘 루카 복음 11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이어 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갈라서지 마라고 하십니다. 함께 하나가 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형제라서, 가족이라서, 민족이라서 하나가 되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 편에 섬으로써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시에, 철저한 갈라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내 형..

20240303 일요일 사순 3주일 묵상강론 요한 3,16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

오랫동안 어려운 관계로 지내온 형제가 있습니다. 어려운 관계가 된 이유도 구구절절하고, 겪어왔던 어려움도 수십 권의 책입니다. 나도 그랬고, 그 형제도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요즘 조금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웃으면서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곧잘 주고받습니다. 누가 먼저다 누가 더 노력했다 말하는 것도 지금은 제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누가 더 힘들었다 누가 더 잘못했다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시간이 지나고 일로 다시 부딪히면 어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둘의 역사에 있어 지금은 처음 겪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 그런데 이 새로운 세상을 살기 시작하면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관계의 변화가 시작된 지금, 나는 지난 어느 때 보다 약하다는 점입니다..

20240228 사순 2주 수요일 묵상강론 마태 20,17-28 [저는 분명 즐거움에 지배되는 사람입니다]

새 소임 임기가 시작되는 2월 1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고 벌써 2월의 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묵상글을 거의 못쓰고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는 건 기도가 부족했거나 아니면 너무 바빴거나 아니면 둘 다였거나 인데, 이번 달은 분명 둘 다 때문이었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했던 지난 3년 간의 양성장 소임을 끝내고, 조금 스스로를 추릴 시간을 2월에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일정이 슬슬슬 비어 있는 날을 어느샌가 다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모든 일들에서 하느님의 일하심과 사랑을 체험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으니, 몸은 쉬지는 못했지만 마음은 충만한 2월이었습니다. ... 지난 1월 저희 수도회 평신도회 세계대회 통역..

20240214 재의 수요일 묵상강론 마태 6,1-6.16-18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사순시기 회개와 전환의 방법 세가지”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지금 글을 쓰는 저도 이마에 재를 얹고 있어요. 오늘 미사 가신 분들 중에는 성당에서 나오면서 털고 나오는 분도 계실꺼고, 또 오늘 미사에 가지 않는 분들도 계시겠죠. 실은 저도 수도원 오기 전에는 재의 수요일 미사에는 잘 가지 않았어요. 오늘 이마에 얹은 재는 아마 오늘 중에 아니면 늦어도 내일 중에는 없어지겠지요. 그래서 이 재가 의미하는 것은 뚜렷합니다. 세상의 것들과 우리의 생명이 덧 없는 것이라는 것과,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 재는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래서 지상에서의 잠깐의 여정이지요. 동시에 우리는 이 재를 보면서 반대로 영원한 것으로 눈을 돌리게도 됩니다. 그리고 특히 하느님께서 그 영원 속에 약속해주신 용서로 향하게..

20240109 연중 1주간 화요일 묵상강론 마르 1,21-28 [ 내가 만나는 연중시기의 두 가지 의미 ]

20240109 연중 1주간 화요일 묵상강론 마르 1,21-28 [ 내가 만나는 연중시기의 두 가지 의미 ] 성탄시기와 공현 대축일을 지나와 우리는 어제 주님 세례 축일부터 연중 시기를 시작하고 있니다. 오늘은 연중 제 1주간 화요일입니다. 연중시기가 몇 주까지 있는지 아시나요? 34주간까지 있습니다. 가톨릭 전례력에서 연중 시기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성탄시기와 부활시기에서 이어 집니다. 저는 이 시기 동안 기도할 때에 수도생활을 하며 조금씩 알게 된 두 가지 연중시기의 의미를 기억합니다. 첫째, 연중시기는 소박하지만 차근차근 성장해 가는 시기입니다. 연중 시기가 시작 되기 전에는 갖가지 축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참 숨가쁘게 달리다 보면 어느 새 연중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저는 이 연중..

20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묵상강론 요한 1,35-42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카와바타 야스나리) ]⠀

20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요한 1,35-42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카와바타 야스나리) ]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 지난 해 독서모임 마지막 달 12월의 책 설국의 첫문장입니다. 이 두 문장은 일본 뿐 아니라 세계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의 도입부라고 칭송받고 있다고 합니다.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소설로 일본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받습니다. ⠀ ... ⠀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펼쳐지는 완전히 다른 눈의 세상, 아직 짙은 어둠의 무게에 눌려 앉은 듯 어둠 아래로 펼쳐져 있는, 아니면 어슴프레 기차의 빛이 닿는 선로로 빛나는 눈을 창 너머로 보고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