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93

20200602 연중 9주 화요일 묵상 - 평범한 유혹 -

저희 수도원은 입회를 할 때 핸드폰을 끊고 들어옵니다. 아직도 입회하러 가는 길에 서울역 앞 핸드폰 가게에 들러 핸드폰을 해지하고는 나오면서 "아, 이제 들어가는구나." 하고 같이 갔던 동생들과 깔깔대었던 기억이 선합니다. 작년 부제품을 받으면서 근 십년 만에 제 명의의 폰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제 사도직에 도움이 될만한 모델과 가장 싼 가게를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찾아 정하고 가서 계약을 했어요. 새 폰 박스를 뜯을 때 느껴지는 설레임을 몸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폰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건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입회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십년 전 즈음에는 버스 정류장에서 사람들에게 노선을 물어보거나 길거리에서 길을 물어보면 대부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강화도 신학원으로 ..

20200601 연중9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묵상 - 허무한 밤 -

내일이 그대에게 마지막 하루라면 그대는 무엇을 하겠나라는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저는 별다른 답을 할 것이 없었습니다. 제 삶에서 딱히 무엇을 꼭 하고 싶다거나 해야 하겠다는 것이 있었던 것은 짧은 기간 이었을 뿐 대부분의 제 삶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지금은 여전히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내가 해야 할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변화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그건 아마 내 소명을 마지막 까지 해내고 싶다는 소명의식이 제게도 생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것은 오늘 복음은 이 소명의식에 대해 잘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는 일을 하시고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

20200519 부활6주 화요일 묵상 - 그대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어디인가요? -

한국에는 4계절이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여러분은 어느 계절이 한 해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봄이라고 의심 없이 생각했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4계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었나 하는 글을 읽기 전까지는요. 저자에 따르면 그들은 겨울이 한 해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겨울에는 동지, 낮의 길이가 계속 짧아진 끝에 드디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는 여전히 봄을 한해의 첫 계절이라고 생각하고, 어느 계절에 있든 나는 봄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봄은 저에게 출발점이자 종착점입니다. 삶에서 우리는 많은 장소나 사람들이나 기억들이 우리에게 출발점이자 동시에 종착점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더 면밀히 살펴보면 세상 모든것이 다 그렇다는..

20200512 부활 5주 화요일 묵상 - 너에게 평화와 나에게 평화는 같은가? -

한국어를 쓰는 사람끼리도 가끔 같은 단어를 다른 뜻으로 여기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것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으신 적은 없으신지요? 저는 중요한 순간 각자가 다른 뜻으로 알고있는 단어를 사용했다가 곤란해지는 일이 간혹 겪곤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일을 할 때 요령이 있어야지!"하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우와, 수사님 요령있게 일을 참 잘하시네요." "아니, 요령있게 일을 하다니요, 제가 얼마나 성실히 열심히 했는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세요?" 한 수사님이 맵시있고 깔끔하게 일을 빨리 처리하신 것을 보고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그 말을 들은 수사님은 갑자기 언짢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저는 무척 황당했습니다. 좋은 뜻으로 이야기를 한 ..

2020503 부활 4주일 복음묵상 - 그 너머에 있는 -

"아빠, 엄마가 정말 오랫동안 아빠에게 거짓말을 해왔단 걸 알게 된다면, 아빤 어떻게 하시겠어요?" 오랜만에 보고 있는 어느 드라마에서 들은 대사 말입니다. 저도 잠시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청소년기를 지나고 꽤 오랫동안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것들을 별로 보지 않았습니다. 청년기에 제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 제가 봤던 책이나 영상들은 거의 다 자기계발이나, 지식이나 기술 습득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에도 최소한 외국어 공부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달 수 있을 때에만 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인의 선물로 창작과 비평이라는 잡지를 정기 구독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보믐 정말 오랜만에 단편 소설을 하나 읽게 되었는데, ..

20200423 부활 2주 목요일 묵상 - 아빠가 아들에게서 위로받을 수 있는 이유, 하느님의 발자국 -

수도자로서 또 사제로서 지내다 보면 많은 분들이 면담이나 상담을 하게 되거나 또는 삶을 나누어 주시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말씀하시는 분들을 잘 듣고 그분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렇게 듣다보면 '그 처지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라는 종류의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때마다 마음 속 한켠에서 뜨끔해지곤 합니다. '정말 내가 잘 이해를 하고 있는 건가?' 누군가의 입장이 실제로 완전히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입장을 오롯이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고,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투사해서 다른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과장이 되고나서야 예전에 모셨던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