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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7 대림 1주 성 암브로시오 주교학자 기념일 묵상강론 마태 7,21.24 - 27

[이러다 기도 부탁하러 오시는 발걸음들이 끊기겠습니다.] ⠀ ⠀ “신부님 죄송합니다.” ⠀ 가끔 학생대표 폰으로부터 이런 톡이 오는 때가 있습니다. 학생 수사님들 중 누군가가 무언가를 깨뜨렸거나, 일을 잘 못했거나, 귀가 시간을 놓쳐 차가 끊겼거나 하는 일들이 있을 때면 이렇게 시작하는 톡이 옵니다.. ⠀ 드물지만 신학교 시험과 관련해서 오는 경우도 있습..

[나도 모르게 싱긋 미소가 지어졌다.]

⠀ 수도원 학습실의 문을 열었다. 후끈하고 덥덥했다. 익숙한 공기였다. 라지에이터와 빨래가 함께 만들어 내는 그들만의 분위기다. ⠀ 옛날 학생시절 수도원엔 건조기나 가습기가 없었다. 겨울날 우리 작은 방이 마르지 않게 하는 것은 나와 동기의 빨래였다. 겨울이 되면 방 문과 두 개의 침대 사이는 자주 빨래와 건조대의 차지였다. 그리고 건조대를 아주 조금 접어 올리면 라지에이터를 둘 곳이 생긴다. 밤이 되면 방은 후끈하고 덥덥해 진다. ⠀ 십 년이 넘는 양성기를 보내고 나는 사제가 되었다. 양성장이 되어 양성기 학생 수사님들을 동반하며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오늘 같은 겨울 날 그들 학습실 문을 열 때면, 나도 모르게 싱긋 미소가 지어진다. 문지방을 넘어오는 이후끈하고 덥덥한 공기 만큼, 지금 저들이 겪고..

20231123 연중 33주 목 묵상강론 루카 19,41-44 “오늘 나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것“

20231123 연중 33주 목 묵상강론 루카 19,41-44 “오늘 나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것“ ⠀ 요즘 미사를 시작하면서 또 기도 중에 평화를 자주 생각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잃으며 함께 쉬이 잃게 되는 것, 어린 아이들의 생명에 대해 기도하게 됩니다. ⠀ 조카를 갖게 된 후 보는 전쟁터의 어린 아이들 사진은 이전과 다르게 다가옵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도 새롭게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지금 우리가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는 오늘 복음말씀도 조용히 속삭여 봅니다. ⠀ ... ⠀ 묵상 중에 나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또 나의 평화를 빼앗는 것은 무엇인가 묵상해 봅니다. ⠀ 요즘 침대에 누우면 불쾌한 생각, 헛헛한 마음, 불편한 기억들이 밀려옵니다. 종일 기다렸다 ..

[놀이터에서 낙서하기] 2023.11.17 이래 저래 심장이 매우 피곤한 날

[놀이터에서 낙서하기] 2023.11.17 이래 저래 심장이 매우 피곤한 날 ⠀ 오늘은 심장이 매우 피곤한 날이다. ⠀ “13,000” ⠀ 화면에는 만 삼천원이라는 표시가 떴다. 나는 사람들이 제일 붐비던 지하 식품 코너에서 집어 온 삼결살 뭉치의 포장에 붙어 있는 테그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 26,000 원이라고 적혀있었다. 이만 육천원. 계산대에서 연신 바코드 리더기를 움직이고 있는 마트 직원에게 미안했지만 우리는 물어야 했다. ⠀ “저, 이거 이만 육천원 아닌가요?” ⠀ 마트 직원은 그날 수없이 대답했었을 지도 모르는 말을 마치 처음 하는 것 처럼 우리에게 친절하게 이야기 해주었다. ⠀ “아, 네 이거 50 퍼센트 할인하는 상품이예요.” ⠀ 순간 나의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뛰는 가슴은..

20231117 연중 32주 금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묵상강론 루카 17,26-37 “아름다움 보다 그것을 만드신 이에게 감사 ”

20231117 연중 32주 금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묵상강론 루카 17,26-37 “아름다움 보다 그것을 만드신 이에게 감사 ” 새로운 좋은 인연을 맺는 일은 참 멋진 일입니다. 떨어져 있던 인연을 다시 만나는 일도 참 감사한 일입니다. ⠀ ... ⠀ ⠀ 얼마 전에 어떤 계기로 한 작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저러한 사정 끝에 작가님의 신작 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멋진 글씨의 친필 저자 서명과 함께요. ⠀ 책을 보내주시겠다고 주소를 달라셨는데 처음에는 거절했었습니다. 신작을 내셨으면 제가 당연히 직접 사서 봐야하는 것이며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다면 저자 서명을 받겠노라면서요. 그런데 그렇게 톡을 보내고 조금 지나니 혹시 너무 성의를 무시한건가 하고 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주..

20231114 연중 32주간 화요일 묵상강론 루카 17,7-10 “평신도 주일, 평신도 만이 할 수 있는 선교”

2031114 연중 32주간 화요일 묵상강론 루카 17,7-10 “평신도 주일, 평신도 만이 할 수 있는 선교” 몇일 전 아침기도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수련복을 휘날리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수련 2반 수사님이었습니다. 한 달 남짓의 외부 실습을 마치고 돌아온 것입니다. 반가웠습니다. 옛날 제가 실습하던 때 생각도 나서 아련했고, 또 잘 돌아와 줘서 고마웠습니다. “살이 찐건데요.” 기도 후 미사시작 때 ‘살이 좀 빠졌네요’라고 했다가 바로 수련 1반 수사님에게 응징 당했습니다. 형제들과 다 같이 웃으며, 속으로 이제 나도 안경을 써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뜬금 없지만 유쾌한 방어기제라 스스로 칭찬해 줍니다. 아침부터 속으로 바쁩니다. ... 미사를 끝내며 돌아온 수사..

20231113 연중 32주 월요일 묵상강론 루카 17,1-6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는 방법"

20231113 연중 32주 월요일 묵상강론 루카 17,1-6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는 방법" 오늘은 복음에는 정말 중요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먼저 ἄφες (아페스) 입니다. 이 동사의 원형은 ἀφίημι (아피에미) 입니다. '멀리'라는 뜻의 apó 와 '보내다'라는 뜻의 hiēmi 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멀리 보내다, 놓아주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처럼 '용서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주님의 기도에도 나옵니다. ... 주님의 기도는 루카복음 11장과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두 기도문이 조금 다르지만 용서에 관한 내용은 거의 동일합니다. 이 때 용서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가 바로 ἄφες (아페스) 입니다. 주님의 기도 말미에 나오는 이 단어는 우리 신..

20231110 연중 31주 금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묵상강론 루카 16,1-8 “수라를 아시나요?”

20231110 연중 31주 금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묵상강론 루카 16,1-8 “수라를 아시나요?” ⠀ 어제 저는 학생 수사님들과 ‘수라’라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이번 상영은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남자 여자 수도자 장상연합회 JPIC 위원회 등이 함께 서울 피카디리에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상영은 주로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초대했는데 약 100명 정도라는 예상을 넘어 150석이 모두 하루만에 매진 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저도 정평환 위원회 회의 때 참석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맘놓고 있다가 매진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신청서를 써야 했습니다. ⠀ ... ⠀ 강화에서 출발해 김포에 차를 대고 지하철로 가는 길은 2시간 30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라고 투덜거리기엔 ..

20231109 연중31주 목요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묵상강론 요한 2,13-22 “세금 냈는데 왜 그래?”

20231109 연중31주 목요일 묵상강론 요한 2,13-22 “세금 냈는데 왜 그래?” 오늘 성전에서 환전상을 쫓아 내시는 예수님을 보고 책에서 봤던 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따라 저의 삶을 돌아봤습니다. 책 이름이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데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유치원에 아이를 맡긴 엄마들이 계속 늦게 아이를 데리러 오는 일이 계속되자 유치원의 선생님들이 힘들어 졌습니다. 고민 끝에 선생님들은 늦게 오는 엄마에게 시간당 일정 금액의 벌금을 물리기로 결정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치원 선생님들의 고민은 해결되었을까요? ... 아닙니다. 처음 얼마의 기간 동안에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생각지 못했던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엄마들은 벌금을 내면서도 죄송하다며 미안..

20231104 연중 30주간 토요일 묵상강론 루카 14,1.7-11 - 끝까지 끝자리에 앉아 즐길 준비 -

- 끝자리에 끝까지 앉아 즐길 준비 - ⠀ 청년 시절에 몇일 동안의 청년피정이나 캠프 같은 곳에서 가끔 겪는 일이 있었습니다. ⠀ 마지막 날 파견미사 때 참석자 중 하나가 갑자기 정복이나 제의를 입고 나타나 ‘실은 제가 신학생이었습니다’ ‘실은 제가 신부였습니다.’ 라고 밝힙니다. 참석자들은 놀라 웃으며 열광합니다. 그 신학생 또는 사제는 그 순간 잠시 주인공 중의 주인공이 됩니다. 어떤 때는 그게 대단해 보이기도 또 부럽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 … ⠀ 십 년의 양성기간 끝에 서품을 받은 그 해, 저도 처음 그런 상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땐 저의 얼굴은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삼촌 같은 사람이 되었고, 저의 마음에는 더이상 그런 관심의 주인공 되는 것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